1980년대 스파이 스릴러 붐을 이끌었던 로버트 러들럼의 최고작인 ‘본 시리즈’의 첫번째 권이다. 일찌감치 『자칼의 날』『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코드네임 콘돌』과 함께 스릴러의 최고봉에 오른 이 작품은 1980년대와 2000년대에 두 차례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름도, 얼굴도, 국적도 모르는 ‘과거 없는 사나이’ 제이슨 본이 맨손으로 자신의 정체를 추적해가는 『본 아이덴티티』는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면서 겪는 심리 묘사, 배신과 음모로 가득한 정교한 플롯, 박진감 넘치는 액션 묘사가 압권이다. 기억상실과 정체성 문제에 집중했던 영화와 달리 소설은 실제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을 본의 절대 맞수로 등장시켜 정치적 시대상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진 ‘본 시리즈’는 200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새롭게 영화화되면서 탈냉전 시대에 스파이 스릴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작품으로 다시 한번 각광받게 됐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은 시대에 007을 비롯한 여러 스파이 스릴러가 공산국가 대신 중동이나 북한을 적으로 상정했다 뿐 여전히 이분법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 본 시리즈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정교한 심리 묘사로 다시금 주목받았다. 제이슨 본에게 눈이 휘둥그레지는 신무기나 매끈하고 세련된 매너는 없다.
대신 맨몸으로 벌이는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육탄전, 상대의 반격을 몇 수 앞까지 계산하는 전술이 있을 따름이다. 본을 배신자로 오해하고 처단하려는 미국 정부와, 암살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본을 응징하려는 테러리스트 자칼의 음모와 함정이 겹겹이 둘러쳐진 상황에서 본은 과거의 편린이 드러날 때마다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과오에 고뇌하고 자기 회의에 빠진다. 이점이야말로 제이슨 본이 시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사랑받는 원동력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