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쟁이 구보씨의 영화구경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제임스 L. 브룩스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나오는 멜빈 유달이라는 사람은 아주 특이한 성질을 가진 사람이다. 보도를 걸을때는 선을 밟으면 안되고, 입만 벌리면 독설이 쏟아지고, 식당에 가서도 같은 웨이트레스에게 같은 자리에서 자기가 가져온 수저로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다. 개가 아파트 복도에 오줌을 누었다고 자기 개도 아니면서 아파트의 쓰레기통에 처 넣어버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사랑얘기. 이런 사람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사랑얘기.
이게 말이 되나?
이런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게 가능할까? 그것도 한 여자를.
구보씨는 이 영화를 보았다. 보고싶어서 본게 아니고 일주일에 영화를 한프로씩 안 보면 입에 가시가 돋는 구보씨는 볼 영화가 없어서 본 것뿐, <타이타닉>처럼 기다리고 기다려서 본 영화가 아니다. 그냥 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길래 보았을 뿐이다.
야, 영화나 보러가자. 무슨영화? <As good as it gets>나 보자.
구보씨도 영어를 9년간이나 정기적으로 배운 사람이다. 그 정도는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구보씨는 기분이 나쁘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X소리 하고있네. 구보씨는 당시 자신의 상황과 집안의 상황과 그리고 나아가서 구보씨가 살고있는 아,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구보씨는 그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구박받으며 놀고 있었고, 실연의 아픔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고, IMF로 몰아닥친 한파로 구보씨 부친의 정년이 몇년인가 단축되었으며, 국가는 또한 국가대로 국가가 부도 난다느니 하며 난리였다. 또한 대통령에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당선되어서,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구보씨는, 그 영화 제목을 듣자마자 기분이 나빠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 좋다. 오랜만에 영화보고 한번 씹어보자.
구보씨는 평소에 모든것에 대해서 잘 칭찬하는 사람이다. 불평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뭘 봐도 구보씨가 극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면 칭찬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참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구보씨또한 말빨이라면 어딜가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고, 뭔가 마음에 정말 안드는 것이 있으면 그 불규칙한 구강구조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궤변과 독설로 상대방이나 상대물건을 박살내어 버리는 사람이다.
그래 기분도 나쁜데 뭔가 씹어본 적이 없는것 같어. 이번 겨울에는 영화를 보고 감동하지 않은 적이 없어. 12월에 <에이리언 4>를 보고 게거품을 물며 그 영화를 씹어본 다음에는 뭔가를 속 시원하게 욕해본 적이 없구나. <타이타닉>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굿 윌 헌팅>이나 <L.A 컨피덴셜>도 씹을만한 껀수가 없었어. <아이언 마스크>는 보기 전이었고, 그 다음에 이런 글을 쓸만한 가치가 없는 영화는 차치하고, 뭐 씹을만한 껀수가 없나를 찾는중에, 너 잘걸렸다. 오늘 한번 씹혀봐라.
그런식으로 구보씨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꽤 유명한 로맨스 소설가인 멜빈 유달은 독신자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나이가 꽤 들어보이고, 하는 짓이 범상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길을 걸을때는 길거리에 그러진 금을 절대로 밟아서는 안되고, 집에 들어가면 무조건 문을 다섯번씩 잠궈야 하는 사람이다. 식사도 같은 자리에서 해야되고, 더더욱 같은 자리에서 해야만 하고, 누구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캐롤 이 없으면 식사를 하지 못한다. 밥을 먹을때는 집에서 비닐에 포장해 가져온 플라스틱 식기로 식사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입을 열면 독설이 쏟아지는데, 출판사에 가서 누군가가 '어떻게 그렇게 여자에 대해서 잘 아냐'고 묻는 질문에 '남자에게서 이성과 책임감만 빼면 그게 바로 여자'라고 말하는 엄청난 독설가다. 심지어는 자신을 담당하는 정신과 의사에게서도 냉대를 받고 돈을 준대도 진료를 거부당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개과천선해서 사랑에 빠지는 얘기. 이게 말이 되나?
영화는 멜빈이 글을 쓰고 있는데 옆집의 게이화가 사이먼이 파티를 해서 시끄럽게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멜빈이 강아지 버델을 쓰레기통에 빠트리고, 그리고 소설 을 쓰는데 누군가 찾아와서 멜빈의 창작을 방해하고 하는 식이고, 또 그 다음에는 멜빈의 유별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등장하고, 그리고 멜빈이 캐롤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얘기잖아. 그래. 어디서 봤던가. 바로 베스트셀러 극장이나 드라마 게임같은 한국의 드라마에서도 많이 본 얘기다. 노총각과 노처녀의 사랑얘기. 물론 여기는 동방 예의지국인 한국이니까 게이화가가 등장하지 않고 노총각이 그렇게 별난 사람이 아니고 그 노처녀도 애가 있어서 남자와 변변한 섹스한번 못 나눈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지만, 못된 노 총각이 여자를 만나 개과천선하는 얘기는 많이 들어온 얘기다. 이런 흔한 영화가 <타이타닉>이나 <에어 포스 원>같은 블록버스터 사이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로맨스 영화가 성공하는 경우도 많지만, 구보씨는 이런 뻔한 얘기를 비싼 돈주고 앉아서 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구보씨는 할리우드 키드인가 봐요? 것두 블록 버스터만 좋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내면적인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던데.
내가 내면적인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구요? 그렇다고 해 두죠. 뭐.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모든게 다 잘되고 있는 미국의 형편. 바로 As good as it gets 인 미국의 현실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를 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구보씨는 천성적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아파 하는 사람인가 보다.
구보씨는 혼자서 영화를 잘 보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시에 외로움에 벅차서 영화를 보다보니 웬만한 평론가 능가하는 수준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만은, 구보씨는 혼자서 영화보는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왜 좋아하느냐? 그건 물론 영화 잘보는 구보씨가 같이 갈 사람(콕 찍어 말해서 애인)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려니와, 사람이라는 것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슬픈 장면이 나와도 맘놓고 울지도 못하고, 우스운 장면이 나와도 웃지도 못하고, 무서우면 소리 지르게 마련인데 그래도 남자인 구보씨가 누구와 함께 영화를 본다면 대장부 체면에 어떻게 소리를 지르겠는가. 구보씨는 <타이타닉>을 혼자서 5번이나 보았는데 그때는 마음놓고 아무도 없으니까 펑펑울었다. 그런 기억들이 너무 좋은 구보씨는 공개된 익명성을 보장하는 영화관에 혼자서 영화를 보면서 마음껏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구보씨는 <타이타닉>을 볼때는 혼자서 꺽꺽거리면서 엉엉울었고, <터미네이터>을 볼때는 X발 죽이네! 같은 극한의 감탄사들을 연발했고, <굿 윌 헌팅>을 볼때는 심오한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하는 그런 식으루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던 것이었다.<
그럼 이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로 넘어가보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구보씨에게 아무런 카타르시스로 주지 못하는 영화였다. 보면서 극한의 감탄사들을 연발하게 할 수도, 눈물을 뻥뻥울릴 감동도, 구보씨에게 살아온 과정을 생각하게 하면서 주제를 파악하게 하는, 그런 영화도 아니었다.
뭐야 이거. 그냥 웃으면서 아무 생각없이 보는 영화잖아. 이런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뭘 느끼라는 거야.
'나쁜사람' 멜빈이 캐롤과 함께 있기 위해 사이먼을 집으로 데려다 주는 장면에서 구보씨는 이영화가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아니고 (원래가 이런 장르를 블록 버스터이길 기대했던 구보씨가 그르기는 하지만) 그냥 드라마 게임임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결국은 스토리가 이렇게 이어지겠군. 구보씨는 영화를 다 보기도 전에 영화가 어떻게 끝이날지 다 알아버린다.
구보씨가 친구들과 TV 를 볼때를 생각해 보자.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 어떤 장면이 나온다. 자 뺨 한대 갈기고! 맞지? 이제는 품에 안기겠구만. 맞지? 히히. 결국은 싸울거야. 그렇지? 그러다가 또 화해한다구. 그렇지? 허허. 그런식으로 드라마를 보는 구보씨에게 이런 영화는 안봐도 비디오 였다.
그럼 구보씨는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영화를 볼때는 안 그런가요? <타이타닉>이 야 그렇다 쳐도 <에어 포스 원>이나 <쥬라기 공원>같은 영화도 끝은 뻔하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래도 그런 영화는 재미있잖아요. 장면장면이 감탄을 흘러나오게 하잖아요.
<트루 라이즈>같은 영화보세요. 스토리야 완전 거짓말이지만 그 영화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구보씨는 어쩔 수 없는 할리우드 키드인가 보다.
영화를 보자. 역시 멜빈과 캐롤이 잘 되어가는 듯 하다가 또 멜빈의 평소 버릇 때문에 캐롤이 화가나서 가버린다. 하지만 사랑으로 감화된 멜빈은 평소의 나쁜 버릇들을 하나 하나 버리기 시작하고, 급기야 사이먼을 자기 집에서 살게하는 친절까지 베풀면서, 마지막에는 캐롤의 집으로 찾아가서 아름다운 사랑 고백 한마디로 캐롤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났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구보씨는 허탈하다. 뭐야 이게. 차라리 얼마전 보았던 로맨틱 코미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 났겠다.
안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구보씨는 영화의 결말이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이야기로 끝이나자 심기가 상했다. 어찌보면 심통이 났다고도 말 할 수 있겠다. 지금 구보씨와 구보씨의 가족과 구보씨의 조국의 처한 상황은 '이 보다 더 나쁠 순 없는'상황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구보씨가 오로지 블록 버스터만 좋아하는 할 리우드 키드여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구보씨의 바로 옆자리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영화를 보던 연인들이 일어서 며 '영화 참 좋지 그치?' 하며 일어선다. 구보씨는 좋기는 뭐가 좋아!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겉은 참되고 바르게 사는것같이 보이는 구보씨니까.
이 영화는 재미있는 편인것은 같다. 볼만한 영화인거 같어. 하지만 구보씨는 끝내 이 영화에 대한 칭찬 한마디 하지 않는다. 왜냐고? 구보씨는 이 영화를 보고 심기가 불편해 졌으니까. 너무 좋은 이야기만 하니까. 참되고 바르게 살라는 이야기만 하니까. 저럴 수 있는, 착해지기만 하면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멜빈이 라는 사람이 부러워서 그런가. 에이 모르겠다.
구보씨는 결론을 내린다. 저건 드라마 게임이야. 텔레비젼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할리우드라는 데가 원래 영화를 만드는 데는 도튼데라서 좀 더 특이하고 재미있게 느껴질 뿐. 잭 니콜슨과 헬렌 헌트라는 배우의 연기가 너무 뛰어났을 뿐, 구보씨는 이 영화가 단순한 베스트 극장이나 드라마 게임같은 내용일 뿐이지 결코 뛰어난, 작품상 후보에 오를만한 영화는 아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