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쟁이 구보씨의 영화구경 - 무사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구보씨는 옛날에 여자친구라는 것을 만들었었던 적이 있다. 시작이 아마도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고, 그게 스물 다섯쯤에 끝이 났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그 중간에 구보씨도 대한의 젊은이 였던 까닭에 (현재는 젊은이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군대를 무려 30개월이나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실제적으로 여자친구를 소유했던 기간은 1년이 조금 넘는다. 언제나 영화구경이라는 글을 쓰면서 여자친구 이야기로 시작해서 여자친구 이야기로 끝을 맺음으로 이 글 또한 그놈의 여자 이야기로 끝을 내서 또 못 믿을 게 여자라는 뻔한 이야기로 끝을 맺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샘솟는다.

뭐 항상 그랬잖아요.

매트릭스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렸을 때는 폭주하는 메일을 참지 못하고 삭제한 적도 있죠 아마? 그 글은 좀 심했어요.

오늘 구보씨가 하려는 이야기는 여자에 대한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또 "여자"로 시작하는 것은 오늘 구보씨가 영화 <무사>를 보다가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구보씨가 <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또 그 "여자" 라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예전에 구보씨는 여러 영화들 (<카사블랑카>나 <기쁜 우리 젊은 날>, <위트니스>등의 사랑이야기 영화)에 감동 받은 영향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죽음>" 이나 또는 "<죽음>을 맞는다면 사랑을 위해서" 하는 트릿한 말들이 멋있다고 느낀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 때 (스무살이 되기 전에 시작해서 스물 다섯쯤에 끝났던 그 때)에는 정말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죽을"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구보씨는 정말 그 '사랑'이라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때 무엇을 위한다는 것이 '사랑' 이라는 감정에 속했었던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대상이 되는 '그 여자' 였던지는 이제 기억이 모호해졌다.) 이 한 목숨 초개같이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무사>에 그 '사랑' 이라는 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렇다. 바로 그거다. 구보씨가 스물 다섯쯤에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병>의 잠재기를 지나 <거의 죽음에 이를뻔 했던 병>이 발병하고 <정말 가까스로 살아남은>상태가 되어서야 그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뿐인 귀한 목숨을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데 바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구보씨는 오늘 <무사>를 보면서 여태까지 구보씨는 속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구보씨는 머리가 안 좋고 (현재 구보씨가 근무하는 기관의 기관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또한 기억 손실증 비슷한 증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라는 놈이 하나뿐인 목숨을 훼손해가면서 성취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한번 깨닫고 난 이후에 그렇다면 하나뿐인 목숨은 어디쯤에다 희생하면 조선일보 사회면에 헤더로 나갈지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구보씨가 오늘 영화 <무사>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그 하나뿐인 "목숨"이라는 것이 어디에 쓰일 때 가장 값진 것일까 쉽게 말해 목숨이 가장 돈 되는데 쓰인다면 어떤때일까 하는것이다. 영화가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기록했고 그게 걸작을 만들기 위한 것 이었든지 아니면 돈 지랄이었든지에는 구보씨는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구보씨가 감동받아 눈물을 뻥뻥 흘리고야 만 것은 바로 '왜 죽느냐' 라는 것이었다.

영화 포스터에 보면 9인의 고려무사 이야기라고 쓰여있다.

고려무사는 9인이 아니다. 처음에는 떼로 등장했다가 두 번의 떼죽음과 몇 번의 각개 죽음으로 인하여 9명으로 줄었다는 이야기 인 것 같은데, 구보씨 기억으로는 9명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로 봐서, <황야의 7인>이나 <새벽의 7인>같이 사람의 숫자가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이 영화는, 고려 말 정치적인 관계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던 몇 무리의 사신단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데, 감독이 고려시대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작살 이야기를 구상했다가, 역사책을 뒤지고 뒤지다가 끝끝내 끼워 맞추었음이 틀림이 없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고려때 공민왕이 어쩌구… 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명에 사신을 보냈다가 간첩혐의로 투옥된 일군의 사신들. 대부분이 귀환했지만 귀환하지 않고 행불로 기록된 몇몇의 사람들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제이다.

영화는 "저자의 고통을 덜어줘라"하는 끔찍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그 끔찍한 이야기의 발단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고려 사신단이 중국에 도착했다가 간첩혐의로 귀양을 가게 되고, 귀양을 가는 도중 원나라 병사들에게 몇몇의 고려 사신단을 비롯한 명나라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그 고려 사신 호위무사 최정이 사신단을 이끌고 고려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하고, 독단적으로 사신단을 이끌게 되는데, 사신단 중 부사가 험난한 여정 도중 과로사하게 되자, 옆에서 머리를 산발한 뭔가 있어 보이던 청년무사가 그 부사의 시체를 끌고가고, 그 와중에 고려 사신단은 명나라 고위관리 납치(주원장의 딸)사건의 주범인 원나라 병사를 만나게 되고, 고위관리 구출작전으로 명나라의 인정을 받아서 위장 간첩단 침투 사건의 결백을 증명함 과 동시에 고려로 좀 편하게 돌아가고자 하는데, 명나라 공주가 가자고 하는 곳이 해안의 어떤 성인데, 그 성으로 가는 도중 원나라 병사의 추격으로 몇번의 떼죽음과 여러 번의 각개 죽음이 산발하고, 공주가 가자던 성에 도달해보니 성은 <헌티드 힐>에나 나옴직한 다 쓰러져가는 폐성이었는데, 폐성에서 마지막 전투끝에 전원 몰살하고 한 사람만이 살아남아 고려로 돌아간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사실 영화 줄거리는 별로 볼 것 없다. 영화 줄거리라면 구보씨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렸던 옛날 영화 <귀천도>가 훨 나았던 것 같다. 꽤 괜찮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귀천도>는 캐스팅 난항과 연출력 부족, 제작비 부족등으로 졸작이 되고 말았지만, 구보씨가 대한민국 21세기 최고의 블록 버스터라는 <무사>를 보면서 <귀천도>를 떠올리는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남자들이 왜 죽는가.

이경영이 감독하고 김민종이 출연한 영화 <귀천도>를 보면 정말 '사심없는' 남자들이 등장하여 '주군'의 명령에 따라 '사심없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영화 <무사>는 '복잡다난한' 남자들이 등장하여 '의지'에 따라 '복잡다난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영화 <귀천도>에서는 정말 중요한 세 남자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떼 남자들이 등장하여 자신이 왜 죽어야 되는지에 대한 일말의 의문 없이 또는 일말의 두려움없이 사시미를 들고 (구보씨는 모든 식칼보다 긴 칼을 사시미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M-16으로 돌진하여 정말 사심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교과서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중요한 세 남자중 한 남자는 임금의 명을 지키기 위하여 결계가 되었다가 결계가 깨지자마자 난도질 죽음을 당하고, 남은 두 남자중 한 남자는 무사다운 최후를 위한 마지막 결투에서 전사, 한 남자는 어명을 지키기 위한 전사 결국은 동반타살 다른말로 동귀어진 등등의 사심 없는 죽음을 보여준적이 있다. 정말 <귀천도>는 사심 없는 남자의 최후에 대한 매뉴얼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최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무사>하고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인 것 같은데요.

아니죠 무지하게 상관 있는 이야기죠.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사심'이라는 것이 어떤것인가에 대한 차이죠. <무사>가 마음에 든다면 그 망할놈의 '사랑'이라는 것 땜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영화를 계속 보자.

영화에서 처음으로 죽는 사람은 사신단의 두목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부사에게 뭐라 말 몇마디 하다가 목에 화살을 맞고 즉사를 한다(이 영화에는 여러가지 죽음의 형태가 보여진다. 병死, 즉死, 최후의 할말 하다고 死, 비장한 표정의 死 등등등) 그 후에 '사심'과는 관계없는 떼죽음이 이어지고 그 다음으로 죽는 사람이 여솔의 주인 부사이다. 여솔에 영화 초반 내내 부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에서 저 두사람이 틀림없이 뭔가 끈끈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부사가 병사하자 여솔은 시체를 고려까지 끌고 가겠다는 듯 시체를 말에 매달고, 말을 뺏기자 직접 끌고 간다. (여솔과 부사의 관계가 중요하다. 나중에 여솔의 죽음과도 관계가 있다고 구보씨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사는 죽으면서 노비이던 여솔을 자유인으로 풀어준다. 자유인이 된 여솔은 갈 곳이 없어지고 구출한 부용공주의 청에 따라 (또는 강제적으로) 부용공주를 호위한다. 공주를 잡을 의무를 가지는 원나라 장군은 (장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장교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부용공주를 잡으려고 고려 무사들을 뒤쫓기 시작하고 그 중간에 한번의 떼죽음과 몇번의 각개 죽음이 일어난다.

구보씨는 감탄한다.

여기서 감탄이라 함은 사람이 잘 죽어서 감탄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드디어 블록버스터 같아짐에 감탄하는 것이다. 잘 찍었구만… 잘 찍었어.

사람 떼로 죽이는 영화는 아무나 만들수 있죠.

<비천무>에서도 여러 차례의 떼죽음이 일어나죠? 그리고 한 칼에 한 떼죽음도…

구보씨가 감탄하는 것은 <비천무>의 죽음과 <무사>의 죽음은 차원이 틀리다는 것이다. <비천무>에서의 죽음은 엽기토끼가 머리로 유리병을 깨뜨리는 차원, <아치와 씨팍>에서 형사가 보자기맨들을 쏴 죽이던 그 컨셉의 죽음이었는데 비해 <무사>의 죽음은 웬지 모르게 불편하더라는 것이다. 마치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 대령이 죽는 장면처럼.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랑스럽던 용호군이 최정 장군을 제외하고는 몽땅 떼죽음을 당하고 (벌집죽음) 진립의 통솔로 토성까지 도착한 고려무사들은, 이제 원나라 군사들과 마지막 결전을 준비한다. (중간에 역관과 스님이 대립하는 이야기라든지, 어머니 생각에 중국인 노인을 업고가는 고려무사이야기 등은 생략).

구보씨가 울어버린 장면은 여솔이 죽는 장면도 아니고 최정이 죽는 장면도 아니었다. 바로 최정의 별장 가남이 죽을 때 였다. 그렇지. 죽을려면 저렇게 죽어야지. 구보씨가 본 영화에서 가장 싸가지없는 죽음은 <간첩 리철진>에서 한강다리 위에서 "끝났어!"를 외치며 뛰어내리던 그놈이다. 최정을 위해 죽으러 가면서, 진립에게 자기 마지막을 보아달라는 부탁을 하며 뛰어내려가는 저 사심 없는 모습. 그 대사 한마디.

그 한마디에서 <무사>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일언지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가남이 왜 죽을까? 가남이 죽은 이유가 국가에 충성 부모에 효도 같은 그런 거창한 이유도 아니고 어떤 여자가 자기를 떠나서(싫어서 떠나든 죽어서 떠나든) 그녀 없는 세상이 살기가 싫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가남은 최정이 자신의 주군이었고, 자신의 주군을 지키지 위해서 자신이 죽는다는, 어찌보면 충성이라는 거창한 이유인 것 같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무엇' 때문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죽는 것이다.

고로 이 영화에서 무언가 때문에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솔이 부용공주에게 던져진 창을 맞고 죽잖아요.

구보씨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솔은 처음 부사를 목숨같이 따른다. 부사가 죽고 자유인이 되자 목숨같이 따를 무언가가 없어진 것이다. 고려로 돌아가는 목적이 머리카락을 고려땅에 묻어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진립의 존재로 그 이유또한 빛이 바랜다. 더욱이 여솔은 고려땅에 가족이 없다. 여솔은 부사의 시체를 사막 땡볕에 끌고가는 편집증환자 적인 증세까지 보인다.

구보씨 생각은 이렇다. 여솔이 더 이상 목숨같이 의지할 상대 즉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이유가 없어지자 그 이유를 부용공주한테 돌리고 주군을 위해 바칠 목숨을 부용공주를 위해 바친것이지 여솔이 부용공주에게 첫눈에 반했다든지 사랑을 위해서 죽은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최정 또한 부용공주를 구하기 위해서 죽은것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신념, 자신의 의지를 위해 한 목숨 초개같이 바친것이다.

누가 자기를 어떻게 판단하든 자신의 의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 아닌가. 남이 보기엔 개 죽음이라도 자신의 판단에 영웅적인 죽음이라면 그게 영웅적인 죽음인 거지. 장동건이 국제호텔 앞에서 칼 맞아 죽을때도 조폭의 영웅적인 끝이란 길거리에서 사시미가 되어 죽는것이라면 영웅적인 죽음이었을 수 있다. 누구나가 영웅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첩혈쌍웅>의 주윤발의 죽음이나 그저 그랬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밀러대위의 죽음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개죽음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의 자신의 시작이나 현실이나 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건데…

구보씨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더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영화를 보고 나온 시간이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이었기도 하고, 내일 강의가 걱정되기도 하고, 또한 더 생각하기에는 구보씨 머리의 니코틴 한계 용량이 초과치에 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여튼 구보씨가 여기서 내린 결론은 있다.

예전 생각했던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죽음>" 이나 또는 "<죽음>을 맞는다면 사랑을 위해서" 라는 개소리들을 싹 잊어버리고 새로 Define 하기로 했다는 것.

원래가 여자라는 짐승들은 목숨을 바쳐 지켜줄만한 또는 거기에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목숨이라는 거창한 것 말고 좀 만만한 거라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거…

또한 구보씨가 죽는다면 한손엔 마우스를 쥐고 모니터앞에서 최후를. 현재는 그게 구보씨의 목적이고 사는 이유이고 또한 명분이니까.

P.S : 혹시 감독이 준비중이라는 네시간 짜리 디렉터스 컷이 개봉되었는게 전량을 다 붙여보니 최정하고 여솔하고 부용공주가 삼각관계 허리케인 박이었고 여솔이 부용공주를 너무나 사랑해서 대신 죽었더라... 일케 되면 김성수 감독 영화는 다시는 안 볼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