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쟁이 구보씨의 영화구경 -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구보씨는 컴퓨터라는 것을 만진지 오래된 사람이다. 어릴때 Basic으로 흑백 모니터에 형형단색의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을 작성했던 "태생이 가벼운" 프로그래머다. 당연히 모뎀이라는 걸 이용해서 PC통신이라는 걸 시작한지도 무지하게 오래되었다. 군대 가기전에 가입한 KETEL부터 시작해서 HITEL, 나우누리를 거쳐 최초의 국내 인터넷 사용자 그룹의 한 사람이었던 사람이다. 얼리 어댑터 성향이 강한 구보씨는, 뭔가 나오면 우짜든동 써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케이블 모뎀이 나오면 그거 쓰고, ADSL이 나왔다길래 괜히 멀쩡한 케이블 모뎀을 바꾸고, 지금은 VDSL이 지원되는 지역으로 이사갈 궁리를 하는 사람이고, 여하튼 새 기술에 무지하게 민감한 사람이다.

구보씨가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예전에 PC 통신 나우누리에 바둑 동호회에서(구보씨는 바둑을 전혀 못둔다) 읽은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함부로 1급을 논하지 말라.
바둑 1급을 가진 사람들은 1년 이상을 기원에서
점심과 저녁을 짜장면으로 형편이 풀리면 볶음밥으로 지난 사람들이다.
짜장면과 볶음밥의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1급을 함부로 탐하지 말라!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구보씨도 바둑 1급을 향하여 짜장면과 볶음밥에의 집념을 불태운적은 없지만, 비슷한 열정을 가지고 특정 대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마음껏 표출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시절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을 듣고 만 구보씨는, Led Zeppelin에 환장해서 보충수업비 떼먹고 레코드 판을 구입하고, 7집 <Presence>를 구할 수가 없어서 청계천으로의 원정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이다. 뿐인가? 뭔가에 환장을 잘 하는 구보씨는, 어떤 좋아할만한 건수가 나타나면 앞뒤 안 가리고 환장해 버리는 사람이다.

또 무슨 소리를 할려고 그래요? 그 환장할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를 갔겠네.

글쎄요. 서울대가 환장할만한 거리였으면 서울대에 환장해서 서울대를 갔을지도 모르죠. 서울대는 환장할 거리가 못 되었나봐요. 일단 재미가 없잖아요.

프로그래머로서의 태생도 가벼운 구보씨는, 그노므 "재미" 라는 것에 너무 치우친 예술적인 태생도 가벼운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를 봐도 헐리우드 키드가 될 수밖에. 재미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니아 기질이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구보씨도 마니아 기질이 강한 사람이다. Beatles에 환장하고, Ozzy Osbourne에 감동하고, Metallica에 발광하고, Back to the Future에 맛이가는 구보씨는 좋아할 만한 대상이 나타나면 거의 모든것을 다 바치는 사람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부분이 비용적인 것인데, 뭐 고생이야 돈이 하는거지 사람이 하는게 아니므로 구보씨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이상한건, 뭐든지 간에 취미로 할 때가 좋더라는 것이다. 구보씨가 조선쟁이로의 삶을 살고 있을 때,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은 항상 술이 덜깬 얼굴을 하고 있던 구보씨가 옷벗은 컴퓨터만 보면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하지만 구보씨가 전산쟁이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난 뒤, 그 환장하던 컴퓨터라는 것이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다. 구보씨가 컴퓨터라는 것에 관련되어 마지막으로 환장한것은 3년전인 2001년 Microsoft.NET이라는 것이고, 그 후로는 별로 환장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죠 뭐. 구보씨도 서울까지 레코드 판 사러 갈 정도로 철이 안 든건 아니잖아요.

구보씨도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해 본적이 있다. 하지만 <Matrix : Reloaded>가 개봉한 뒤로는 그 생각이 싹 바뀌었다. 아직 구보씨도 뭔가에 환장할 수 있는 열정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구보씨는 <Matrix> 시리즈 덕분에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고,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으며, 나아가서 살아있음을 깨닿게 되었던 것이다.

뭔가를 이토록 기다려본적이 있었던가.

뭐든지 간에 무작정 기다리기를 좋아하는 페넬로페의 서브 타입인 구보씨는, 아직도 무작정 기다리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구보씨의 나이가 30이 넘으면서, 뭔가 기다릴 만한 것이 팍팍 줄어들더니, 언젠가 부터 기다릴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뭐 한번쯤 기다릴 만한 것이 나타나긴 했었는데, 역시 가만히 보면 별로 기다릴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아무리 기다려봐야 안올것들이 확실한 것들이었고, 기다릴 사 적막함이란 야속하기 짝이 없는 것들 뿐이었다. 그러다가 혜성같이 나타난 것이 있었으니! 바로 <Matrix>였다.

98년 개봉했던 매트릭스를 환장하며 봤던 구보씨는, <Matrix Revisited> DVD를 사 보고 매트릭스가 3부작으로 구성되어 2부와 3부가 2003년 개봉한다는 것을 알았다. 구보씨는 2003년 5월을 하념없이 기다렸다. 구보씨는 매트릭스 관련 기사라는 기사는 다 찾아봤고, 매트릭스 관련 서적이란 서적은 다 읽었고, 매트릭스 DVD를 구입하여 보고 또 보고, 나아가서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고, 라깡을 읽고, 페르세포네를 다시 찾기 위해서 그리스 신화를 다시 읽어보고, 모피어스를 찾아보기 위하여 성경까지 다시 읽고, 메로빈지언을 찾아보기 위해서 세계사를 뒤져 유럽 역사에서 메로빈지언을 찾아냈다. 1부에서 총알이 날아갈때 정말 로켓의 속도를 가진 카메라가 있어서 총알이 그렇게 찍힐까를 알기 위해서 물리학 서적들을 뒤져봤고, 인공지능 책을 구입하여 매트릭스가 구현 가능한지 연구하고, 공각기동대를 다시 보고, 막부의 역사와 비교를 위해서 일본사 책을 뒤져보고, 디지털 캠코더를 구입하여 실제로 그런 장면들을 찍어 보고, 어쩌면 잘 찍을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영상학 책들을 구입하여 읽고, 영상 편집을 위해서 영상 편집 소프트웨어 관련 서적들을 사 읽고, Rage Against Machine의 음악들을 들었다. 한번 들은거 잘 안 잊어버리는 구보씨는 오만걸 다 기억하게 되었음에 당연하다.

이래서 영화가 여자친구보다 좋은거예요. 여자친구를 기다릴때는 하염없이 사진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지만 영화를 기다리면 이렇게 할 일이 많잖아요.

구보씨는 매트릭스의 매니아다. 매트릭스 매니아 이기 전의 구보씨의 매트릭스 매니아가 되고 난 후의 구보씨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구보씨의 삶은 그만큼 충족해졌다. 구보씨는 매트릭스 때문에 시뮬라크라와 시뮬라시옹을 읽었고, 유럽사에 누구보다 더 빠삭해졌다. 구보씨는 매트릭스 매니아가 됨으로 인해서 매트릭스만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삶이 풍족해 질 만한 수준의 지식을 얻게 된 것이었다.

각설하고, 구보씨는 얼마전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보았다. 환장에 환장을 거듭하였음에 당연하다.

중학교 시절, 구보씨의 같은 반 친구가 <영웅문>에 환장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덕에 구보씨는 <사조 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읽었고, 역시나 환장했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나중에 <영웅문>을 영화화하자는 말을 한적이 있는데, 구보씨도 그 말이 그럴듯 하다고 느낀적이 있다. 하지만 구보씨는, 대학 시절 <반지의 제왕>을 읽고 나서 <영웅문> 보다는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 하면 훨씬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웅문>은 아무래도 스케일이 작아질것 같어. <반지의 제왕>은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도 있고 모란논 전투도 있고 헬름 협곡의 전투도 있지만 <영웅문>은 글쎄..

<영웅문>에도 몽고군과의 전투 씬이 많잖아요. <반지의 제왕>이나 비슷하지 뭘...

아니다. <반지의 제왕>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것이 싸우지 않냐. 오크와 드워프와 고블린과 인간과 엘프와 트롤과 나즈굴과 우르크 하이가 떼로 몰려서 전쟁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을것 같다. 또한, 영웅문에는 이연걸이나 견자단같은 배우들이 한 두명 필요한 것이 아닌데 반지의 제왕에서는 배우들을 대강 써도 되지 않을까. <반지의 제왕>이 훨씬 더 재미 있을것 같애.

2001년 크리스마스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를 본 구보씨는 환장했음은 당연한 수순이다. 구보씨는 당연히 <반지의 제왕> 6권 황금가지 버전을 다 읽었다. <호빗>도 읽었다. <실마릴리온>도 읽었다. <호빗>의 번역이 너무 맘에 안들어서 구보씨는 <호빗>의 원서를 아마존에서 주문하여 읽었다. 내친김에 <반지의 제왕> 3권을 아마존에서 주문하여 다 읽었다. <실마릴리온>도 당연히 원서로 읽었다. <실마릴리온>을 읽을때는 종족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이 너무 헛갈려서 옥스포드 영영 사전을 사서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구보씨는 로스로리엔 반지 연구소 연구원 못지않은 반지의 제왕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급기야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하고 여권에 비자까지 발급 받았다. 구보씨 최초의 개인적 목적의 출국을 경험했다.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이 개봉했고 드디어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이 개봉했다. 구보씨는 개봉날 CGV 12관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이럴수가. 구보씨는 구보씨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타이타닉>을 보면서 흘러나왔던 감탄사를 연발하기 시작한다. "오 신이여 정말 내가 이 영화를 보았나이까"

구보씨는 <영웅문>보다 <반지의 제왕>이 훨씬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되었다.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로한의 기마병이 모르도르의 오크 군대를 싹쓸이 하는 장면에서 구보씨는 슬픔이나 감동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닌 진정한 싹쓸이의 카타르시스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경험하고야 만 것이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구보씨가 여섯번째 볼 때, 구보씨는 주위에서 영화를 보며 하는 말들을 듣기 시작했는데, 구보씨는 픽픽 웃어가며 영화를 보게 되었다.

마법사가 왜 저리 힘이없어?
왜 아라곤이 난데없이 왕이 되지?
사루만이 왜 안나와?

뒤에서 들리는 몇몇 소리들을 킬킬거리며 비웃다가, 나중에는 무지한 관객들이 불쌍해지고 경멸스럽기 까지하는 경험을 하고야 말았던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틀림없는 위대한 연대기이며, 역사서이고, 신화이다. 영화를 본 구보씨는 서점에서 <지도로 보는 반지의 제왕>을 구입했고, 앵글로 색슨족이 살고 있는 지방 나라들의 건국신화와 <실마릴리온>의 건국 신화를 비교하여 도표까지 만들었다. 노르웨이 바이킹의 움직임과 놀도르 족의 움직임을 비교해보고, 요정족의 언어와 모르도르의 언어를 비교하여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어내기 까지에 이른다. (물론 구현은 안했다. 논문은 쓰고 있는 중이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열 두번째 보고 나온 구보씨는 가슴이 뿌듯하다.

구보씨는 자신이 마니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로 했다.

구보씨는 앞으로도 뭔가 미칠게 나타나면 앞뒤 안가리고 왕창 미쳐버리는 마니아 같이 살기로 했다. 그런데 진정으로 서로 같이 미쳐서 이뻐하고 환장같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왜 안나타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