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쟁이 구보씨의 영화구경 - 봄날은 간다


구보씨도 30년을 사는 동안 한번 실연이라는 것을 당한 적이 있다. 예전에 누군가가 말한적이 있다. 한국 사람의 정서는 '한' 이랜다. 구보씨는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한국 사람의 정서가 그 빌어먹을 '한' 이라면 한국 남성의 정서는 무엇일까에 대해서 토론해 본적이 있다. 한국 남자의 정서는 '개평'(도박에서 돈을 다 잃고나서 조금 받는 그것) 이라고 말한 놈이 있는가 하면 '카드 고지서'라고 말한 놈이 있는데 구보씨는 한국 남자의 정서는 바로 '실연'이라고 역설했던 적이 있다. 술을 먹는 도중에는 별로 동의한 사람이 없었는데 나중에 술을 다 먹고 노래방에 가서 누군가 불렀던 이승환 노래, 그 애끓는 <애원>을 듣고는 다들 맞다. 한국남자의 정서는 실연이다라고 동의했던 적이 있다.

이상우라는,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돈은 안되지만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키 크고 멀끔하게 잘생긴 남자가 있다. 이 남자가 강릉에서 '자연의 소리를 찾아서' 라는 라디오 프로의 아나운서이자 PD인 한은수라는 여자를 만나서 같이 일하게 되는데, 그게 문제다. 영화를 보기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를 대충은 알고 갔던 구보씨는, 거기서 비극이 시작됨을 알게 된다. 구보씨는 이 영화 보기전에 <씨네 21>이라는 영화 주간지에서 노희경이라는 아줌마가 <봄날을 간다>를 보고 쓴 감상을 읽은 적이 있다. 영화를 다 본 구보씨는 상당히 열 받는다. 노희경 아줌마는 상우가 어리광을 피우는 남자라서, 너무 순수한 남자라서 이혼녀에 세상에 찌들만큼 찌든 은수가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는 말을 했다. 구보씨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너무 순수해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라구? 천만에, 원래 여자라는 짐승들이 다 그런 짐승들이 아니던가. 좋으면 왔다가 싫으면 가는. 그런 습성을 가진 동물이 원래 여자가 아니던가.

세상, 뭐 거창하게 세상 까지 거들먹 거릴거 까지 없고, 구보씨가 사는 조선이라는 변방의 조그만 나라에, 거기다 더욱이 더 좁은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30년 세월을 살아온 구보씨가 아는 또래의 남자중에, 한번쯤 실연의 아픈 기억을 가져보지 않은 남자가 없었다. 친한 친구, 모시던 직장 상사,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 모두가 아픈 실연의 상처를 가져본 적이 있는데, 그 못난 인간들의 말들을 술과 함께 듣다 보면 다들 헤어질때는 상우같이 바보같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바보 같은 남자들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는데, 다들 헤어진 여자 집 앞에서 밤 새워 본 적이 있고, 술 먹고 여자한테 전화 또는 찾아가 본 적이 있고, 친구등 아무나를 껴안고 펑펑 울어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튼 영화는 상우가 (구보씨는 여기서 '내가' 라고 쓸 뻔 했다) 소리 녹음을 위해 여자를 만나러 강릉으로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기차역의 의자에 앉아 졸던 은수를 휴대폰으로 깨워 둘이 만나서 소리를 녹음하고, 대받에서 대받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녹음하고, 밥을 같이 먹으면서, 눈내리는 새벽 절간에 울려퍼지는 소리를 같이 녹음하면서, 둘의 사랑은 싹트기 시작한다.

그래. 원래 사랑이란게 그런게 아니던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가 아프게 사라지는 것.

상우는 '라면이나 먹자'라든지 '자고 갈래요?' 라는 말로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은수의 말대로 라면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그런 순수한 남자다. (여기서도 구보씨는 또 '나는' 이라고 쓸 번 했다.) 씨네 21에 글 쓴 노희경 아줌마 말마따나 상우는 은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순수한 남자였는도 모른다. 노희경 아줌마는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른다고 쓰셨는데, 구보씨는 그 말에 100% 동감한다.

순수가 사랑을 방해해요? 사랑은 순수한 것이라면서요.

사랑이 순수하면 아름답지만, 사람이 순수하면 호구가 되거든요.

구보씨 역시 꽤 순수한 사랑을 할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다. 원래 인간됨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구보씨는, 어떻든 사랑했던(하는) 그 여자앞에서 만은 순수할려고 노력했었던 일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던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구보씨도 여자가 무슨 일로 늦게온다면 정말 바쁜가보다 하고 늦게 까지 추운날 밖에서 벌벌 떨면서 기다려보기도 하고, 그 여자와 헤어질 때 정말 부모님께서 반대하셔서 그런가 보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데 오로지 부모님의 반대로 그러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영화나 만화 이야기 처럼 친구 두명과 그 여자 어머니를 찾아뵙고 맞짱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 본적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게 영화나 만화하고는 완전히 다른 법. 윤종신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아무말도 못하고, 단 두마디 "아직 우리 사랑합니다", "네…" 가슴에 한이되는 두마디 만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차라리 그때 그 여자와 결혼할 (지금은 결혼한) 그 남자를 찾아가서 과거를 몽땅 불어볼 껄. 아니면 맞장이라도 떠서 다시는 접근도 못하게 해 볼걸. 좋아하는 사시미 칼 부림이라도 해 볼걸.

하지만 지금 구보씨는 그때와는 다르다. 구보씨는 이제 사랑을 조롱도 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다. 구보씨도 사랑이 운명이나 숙명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때, 예전에, 다 지난 가을 날 저녁 어떤 여자의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던 그날밤, 구보씨는 가을 하늘을 보며 막막 펑펑 울었다. 그리고 삐삐를 5분 간격으로 쳐 댔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삐삐에 메시지를 담던게 유행이었다. 구보씨는 그 여자의 삐삐 메시지 함에다 대고 술취함과 울음이 썩인 목소리를 힘겹게 토해냈다.

그래. 나만 아프고 나만 힘들지. 그래서 순수한 사랑은 이기적이다. 구보씨는 어렸으므로. 그렇게 어린 남자는 이기적이다.

세상은 사랑만 하기에는 너무나 버겁다. 은수와 상우가 헤어지기 시작한 때는 상우가 "말 조심해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고 말한 그 때 같아 보인다. 정말 그랬을까.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사람의 주제가가 사랑밖엔 난 몰라라도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싶은데 북어국 먹으라고 깨우고, 아무리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런 몇마디 말 쯤이야 지나가는 세월에 비하면 금방 잊혀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바보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상우는 바보임에 틀림없다. 예전에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상우가 바보 같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상우가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 예전의 바보같았던 자신을 되 돌려 볼것임에 틀림없다. 바보 같으니. 그때 은수가 상우의 짐을 몽땅 싸서 마루에 내 놓았을때 빌었었어야 되는거야 바보야. 그때 은수가 아무리 짜증을 냈었더라도, 아무리 기분나쁘게 말을 하더라도 그런 내가 라면으로 보여?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어야 되는거야 바보야. 아무리 그때 기분이 나빳더라고 그녀가 떠나고 난 뒤의 기분이 그때 순간으로 기분나쁠때하고 비교가 될것 같아 이 바보야.

결국 은수는 떠난다. 결국이 아니지. 원래 여자란게 그런게 아니던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영화에 멜빈 유달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인기 로맨스 작가인 이 사람한테 팬이라는 한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여자를 잘 아세요?"라고 물어보자 그 사람은 "남자에서 이성과 책임감을 빼면 그게 바로 여자"라고 답한다. 구보씨는 그 말에 50% 동감한다. 이성까지는 모르겠는데 여자라는 동물은 원래 책임감이 결여된 동물이다. 아무리 죽으면 같이 묻힐까? 까지의 대사를 한 여자라도 자기가 싫고 짜증나고 싫증나면 떠나는게 여자기 마련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따위의 대사를 하는 남자 따위는 보기도 싫기 마련이고 다행이라면 상우가 은수를 찾아왔을 때 은수가 새 남자를 대동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그게 원래 정해진 수순이다.

상우는 바보다. 상우는 결국 여자를 보기 위해 직장까지도 때려친다. 그리고 강릉으로 내려간다.
이미 떠난 여자를 다시 찾아간 옛 남자의 이야기는 뻔이다.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거다.

"새 구두를 사기전엔 헌 구두를 버려서는 안 되는 법이여...". 여자라는 건 그런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진리를 잘 아는 동물이다. 이미 새 구두가 있는데 집나간 헌 구두가 돌아와 봤자 다시 신을 리 만무하다. 은수는 찾아온 상우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은수는 "태워줄까?"라고 묻는 상우의 말에 대답도 하지않고 (이 장면. 틀림없이 허진호 감독은 실연당한 적이 있다) 그냥 걸어가 새로 장만한 풋사과색 마티즈에 올라타고 가 버린다. 어딜갈까? 휴일날. 당근이다. 새 구두를 신으러 가겠지.

은수의 새 구두를 확인한 상우는 열쇠로 은수의 차를 그어버린다. 아 통쾌하다. 차라리 갤로퍼로 마티즈를 받아버렸으면 더 속이 통쾌했을 텐데. 다음에 구보씨는 아예 받아버릴 셈이다. (구보씨의 차도 갤로퍼에 맞먹을 만한 강도를 가진 차다) 구보씨는 이젠 예전에 구보씨를 떠난 여자가 차가 없었다는 것이 한이되기 시작한다.

치매를 앓으시던 상우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은수가 돌아온다.

할머니 들리라며 은수가 가지고 온 화분을 상우는 돌려주며 말한다. "잘 가"

상우는 끝까지 바보다. 그렇게 반가워 했으면서. 은수의 목소리가 전화로 들려왔을 때 가슴 저미도록 반가웠으면서. 은수가 "우리 같이 있을까?"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멎을 뻔 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항상 지나버린 시간속에서는 이긴 사람도 없고 지는 사람도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중에 승자로 평가 받는 사람은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남아서 시간을 견딘 사람이다. 은수는 한번 떠났었다. 한번쯤 돌아올 수도 있는 법이다. 돌아와서 "우리 같이 있을까?" 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승자는 남아서 시간을 견딘 상우가 차지한다. 이미 봄날을 가버렸기 때문에. 가버린 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법.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오지 않는 법. 오태호 형님께서 노래 하셨듯이 계절과 여자는 항상 지난 후에야 그리운 법이고, 그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구보씨는 상우보다 훨씬 더 바보다. 구보씨는 아마 절대로 화분을 되돌려 주며 "잘가" 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보씨는 승자도 패자도 될 수 없는 팔자를 타고 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