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쟁이 구보씨의 영화구경 - 타이타닉
얼마전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했다.
구보씨는 천성적으로 무엇인가를 잘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하여튼 뭐든지 잘 기다린다. 나중에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 그걸 사건 말건, 아니면 보건 말건 간에 하여튼 기다리기를 즐겨 하는 편이다. 구보씨는 Windows 95를 거의 2년 동안이나 기다렸고, 그것이 나온 후에도 한 1년간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고,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여 그걸 실컷 사용하면서 기다릴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걸 깨 닿고 나서, 내가 여태 기다렸던 것 중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은 몇 개 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구보씨는 여전히 기다리기를 즐겨 하는 편이다. 한 여자를 아무리 기다려도 그 여자가 돌아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구보씨는 여전히 기다리기를 잘 하는 편이다. 얼마전에 구보씨는 한 여자를 추운날 밖에서 5시간이나 벌벌떨면서 기다려보고는, 결국 만나지 못했으면서도, '기다림은 나의 정서' 라고 까지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센티멘털리스트인가 봐요? 누군가 묻는다. 센티멘틀리스트라고 까지 거창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죠.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힘없이 자라서 힘없이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나 봐요.
구보씨는 힘없이 답한다. 구보씨는 힘이 없다.
구보씨는 영화 <타이타닉>을 일년전부터 기다렸다. 구보씨가 <타이타닉>을 기다린데는 도저히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구보씨가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2학년때였다. 어머니 몰래 일요일에 공부하러 간다면서 집을 나갔던 구보씨는, 당시에 부산 굴지의 재 개봉관이었지만 지금은 에로전문 2본 동시관으로 전락한 삼성극장으로 가서, 형이 후원해준 거금 1000원으로 <터미네이터>를 보았던 것이었다. 물론 극장 안 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극장안에 있던 여러 어른들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세상에!
X발! 죽이네!
저런 X새끼!
X도 아녀 저건!
등등의 극단의 감탄사들을 연발 하는 험상궂은 인상의 어른들 틈에서, 어린 마음에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받으며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후에 비디오로 <터미네이터>를 보면서 카일과 새라의 정사씬이 몽땅 잘려져 나갔었다 는 사실을 알고는 분개하기도 했다). 얼마후에는 형이 <에이리언 2>를 보고 와서는 거의 입에다 게거품을 무는 수준의 이야기로 구보씨에게 그 영화를 보며 받은 감동들을 토해내기 시작하자, 구보씨는 도저히 그 영화를 보지 않고는 배기지못할 수준에 이르러서, 또 <에이리언 2>를 보았다. 어린 마음의 구보씨에게 에이리언은 무시무시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고, 또한 <터미네이터> 를 볼 때와 거의 같은 수준의 극단의 감탄사들을 연발하며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후에 구보씨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시절, 화장실에서 나쁜 친구들과 나쁜 구보씨가 담배를 피워물기도 하던 그 시절, 구보씨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정도는 알게 되었던 시절, <어비스>라는 영화가 또 상영한다는 말을 듣고는, 열심히 공부만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고등학 생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또 가방을 울러맨채 극장으로 직행을 하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전작들 만큼의 극단의 감탄사와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구보씨는 감동하며 극장을 나왔다. 마지막이 너무 허무하다느니, <터미네이터>에서 보여주었던 묵시록적인 계시가 사라졌다는 친구의 말을 듣지도 않은채 구보씨는 여전히 감동 했었던 것이었다.<.p>
그러다가 구보씨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다녀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신분인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젠 마음놓고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자유의식의 절충과,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난동을 부려도 국가의 장래 혹은 선진조국 창달에 놓인 문제점들을 걱정하는 국가의 기둥이려니 생각해 주는 어른들이 고마워서, 마음놓고 영화라는 것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술 먹고 난동 부리기를 즐겨하던 구보씨가 어느덧 입대를 앞둔 어느 날, 구보씨는 <터미네이터 2>라는 영화가 극장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구보씨는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오토바이에 앉아 "아일 비 백"을 외치고 있는 포스터를 보고는, 어린 시절 험상궂은 어른들 틈에 앉아 보며 들었던 그 <터미네이터>의 극단의 감탄사들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구보씨도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 은 드물다는 이야기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냥 어릴적의 극한의 감탄사들이 기억이 나서, 그냥 여자친구와 함께 표를 끊고는 극장안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구보씨는, <터미네이터>를 보면서 옆 자리의 험상궂은 어른들이 내질렀던 그 극한의 감탄사들과 단말마의 비명들을 바로 그대로 흉내내고 말았다. 입을 쩌억 벌리고 극장을 나와서도 구보씨는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하며 형이 <에이리언 2>를 보았을때처럼 입에 게거품을 물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구보씨는 그 <터미네이터 2>를 극장에서만 3번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후로 구보씨는 영화를 별로 보지 못했다. 구보씨가 군대를 간 것이다. 별로 재미있지도 별로 재미없지도 않은 군생활을 하다 휴가를 얻어 나온 구보씨는 애인도 도망가 버려 만날 사람도 없는 차에 영화나 보러가자는 형의 말을 흔쾌히 수락하고는 또 제임스 카메론의 <트루 라이즈>를 보고 말았던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형과 구보씨가 주고 받은 말은 단 한가지였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이란 말야. 젠장. <터미네이터 2>의 액체로봇이 표는 잘 안나지만 그려낸게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구보씨는, 이 <트루 라이즈>를 보면서는 제임스 카메론이 틀림없이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다리를 폭파하고 배우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건물사이를 가로지르는 연기를 시키고야 말았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감독의 도덕성을 문제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TV나 잡지등을 보면서 그게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는, 구보씨는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감독에게 감탄과 경탄을 넘어서 존경까지 표시하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이러르고야 말았다. 혹시 제임스 카메론이 다른 영화를 만들지는 않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씨네 21>이라는 잡지를 매주 사보기까지 하며 신작을 기다렸지만, <스트레인지 데이즈>라는 영화를 제작했다는 이야기 빼고는 그닥 만족할만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구보씨는 또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구보씨는 제임스 카메론이 멕시코에서 <타이타닉>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전 <포스트 맨>을 개봉하여 엄청난 실패를 한 할리우드의 돈다발 분쇄기 케빈 코스트너의 <워터월드>를 보고서는 다시는 물위에서 노는 영화는 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구보씨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구보씨는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타이타닉>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구보씨가 춘향이 이도령 기다리듯이 기다리기로 작정을 한데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지금도 전산쟁이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구보씨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편이다. 그리고 구보씨가 가졌던 그때의 직업은 바로 쇠쟁이 - 조선쟁이 였던 것이다. 나름대로 배에 대해서는 좀 아노라 생각했던 구보씨는 제임스 카메론이 배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무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더더욱이 구보씨가 조선쟁이를 막살하고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산쟁이로 인생의 계획을 수정했을때에는, 제임스 카메론역시 배를 침몰시키는 조선쟁이로서의 본분을 다한 후 그걸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업하는 전산쟁이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거 뭐 통하는 바가 있네.
산넘고 물건너 할리우드의 스타감독과 내가 통하는 바가 있다니.
구보씨는 영화를 보기전에 감동하고 만다. 그리고 구보씨는 거의 편집증적인 증세까지 보이며 <타이타닉>을 줄기차게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결국 구보씨는 1년이 훌쩍 넘어버린 어느날, 조국이 IMF라는 거대한 빙산에 부딛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시점에서 <타이타닉>이 개봉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래 애국이라는 단어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구보씨는, 같이 <타이타닉>을 보러 갈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구보씨는 뭐를 하면 그걸 이벤트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전번에 PIFF영화제를 할 때도 항상 같이 갈 사람을 한달 전 부터 물색하는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구하지 못했다. 어쩌랴. 혼자라도 가야지.
구보씨는 <타이타닉>을 보기위해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화는 시작했다.
잭 도슨이라는 깎아놓은 조각상같이 생긴 아일랜드의 화가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스페인인으로 보이는 파브리치오라는 친구와 포커판에서 타이타닉의 3등칸 표를 따서 타이타닉에 승선한다. 구보씨는 이 장면부터 가 마음에 들었다. 구보씨 는 인생이 도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배에는 거의 돈에 팔려가는 영국의 귀족 처녀 로즈 드윗 버케이터가 타고 있었는데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녀는, 당연히 잭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런닝타임의 반쯤 되는 여기까지를 보면서 구보씨는, 벌써 감탄하기 시작한다. 돈 값을 하는군. 돈 값을 해. 돈 많이 들인 영화는 표가 나는 군. 진짜 같잖아. <타이타닉>에 대해 철저한 사전 준비 를 했던 구보씨는, 제임스 카메론이 물에 가라앉고 말 타이타닉호 내부의 샹드리에 라든지, 아니면 한번 입고 말 귀족 부인들의 의상에 6백 40만달러를 써버렸다 는 말을 듣고 영화를 보고는, 어쩌면 제임스 카메론이 돈지랄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의심은 곧 자취를 감췄다. 드디어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시작하자 배 안은 곧 아비규환이 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로즈는 갇힌 잭을 구하기위해 갑부 약혼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잭과 로즈 가 합심하여 살아남을 궁리를 하며 온 배 안을 뛰어 다니면서, 영화는 온갖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구보씨는 영화를 보다가 혼자서 울어버리고 말았 다. 로즈가 보트를 타고 내려가다가 다시 잭을 찾아 타이타닉에 오르는 부분에서, 제임스 호너의 슬픈 음악에 힘입어, 구보씨는 실로 오래간만에 눈물이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야 만 것이었다. 이럴수가. 눈물이 나다니. 옆자리의 여고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구보씨는 상관하지 않고 그냥 뻥뻥 울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울음이라는 것이, 만사가 다 그렇듯이 한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는것이기 마련이어서, 구보씨는 악사들이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선실안에서 껴 안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마지막의 그 유명한 디카프리오의 대사, 그리고 마지막장면 시계앞에서 잭과 로즈가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목을 놓고 울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구보씨는 모든 일에 감동을 잘 하는 기질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감동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구보씨는 영화 <벤허>가 생각이 났다. 아카데미상을 같이 수상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 신이여 정말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나이까" 하는 감독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구보씨 옆에 누가 있었다면 "오 신이여 정말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있나이까"하는 대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났다.
구보씨는 <터미네이터 2>를 볼때처럼 또 이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애국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벼락맞음에 틀림없는 일이겠지만, 구보씨는 이 영화를 7번 이나 보고 만 것이었다. 세상에. 영화를 많이 보니까, 전산쟁이임을 자부하는 구보씨의 눈에 결점이 몇가지 드러나 보이기는 했지만, 영화는 여전히 훌륭했다. 구보씨는 이 영화의 특별한 몇 장면을 기억한다. 특히 인상깊었던 장면은 이렇다. 디카프리오가 타이타닉호의 표를 포커로 따는 장면. 그리고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럿이 차안에서 정사를 나누는 장면. 구보씨는 카섹스를 해 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 구보씨가 차안에서 누군가와 정사를 나눈다면 구보씨 역시 차 유리에다 손을 턱! 하고 올릴 것 같다. 악사들이 찬송가를 연주할 때 보여주는 노 부부의 모습. 마지막에 로즈가 숨을 거두면서 꿈을 꾸며 잭을 만나는 장면. (이 장면에서 로즈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의 의견이 친구들 사이에서 분분했는데, 구보씨는 로즈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영화를 보면서 시계를 유심히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장면에서 시계는 11시를 가리킨다. 그건 타이타닉이 침몰한 후의 시간이고, 거기서 박수를 치는 사람 중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건 로즈가 죽어서 잭의 곁으로 갔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제임스 카메론이 직접 찍었다는 수중의 타이타닉의 모습. 그리고 전직 조선쟁이로서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타이타닉이 반으로 갈라지는 모습. 특히 배가 갈라지면서 동그란 창에 붙어있는 도너스 모양의 브라켓이 튀어 나오는 장면. 그리고 엔진을 배운적 있는 구보씨가 눈여겨 보았던 배를 후진시킬 때 엔진을 역회전 시키던 모습.
그리고 구보씨가 마지막으로 7번째로 <타이타닉>을 보았을 때 감동받았던 장면. 디카프리오가 타이타닉의 선수머리에 서서 "I am a king in a world"를 외치던 장면. 그때 구보씨는 무엇보다 잭이 부러웠다. '기다림이 나의 정서'라고 생각하는 구보씨는 지금 기다리는 것이 있다. 그 기다리는 것이 돌아온다면 구보씨도 타이타닉의 뱃머리에서 "I am a king in a world"를 외칠 것 같다. 비록 배가 침몰한다 할지라도. 그럴리 없겠지만서도.